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르샤바 봉기 (문단 편집) === 진행 === >"저런, 대포도 없고 전차도 없고 비행기도 없다니... 현대전에서 이런 게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게요'''." > -이오시프 스탈린, 41년 8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Stanisław Mikołajczyk)[* 당시 폴란드 망명정부 대표.]에게[*출처 리처드 오버리,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원제 : Russia's war), p.334] 하지만 바르샤바 봉기는 시작부터 잘 풀리지 않았다. 바르샤바 내의 독일군은 7월 말의 병력 증원을 통해 15,000여 명에서 30,000여 명으로 불어난 상황이었고, 외곽에도 90,000여 명이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30,000여의 병력은 봉기가 시작되자마자 증원되었다. 봉기군 사령관 중 한 명인 안토니 흐루시치엘(Antoni Chruściel)은 국내군이 장악한 영역을 8개 구역으로 구분하였다. 8개 구역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졌다. || '''구역''' || '''지역명''' || || 제1구역 ||도심(Warszawa-Śródmiescie), 구시가지(Warszawa Stare Miasto)|| || 제2구역 ||졸리보시(Zoliborz), 마리몬트(Marymont), 비엘라니(Bielany)|| || 제3구역 ||볼라(Wola)|| || 제4구역 ||오호타(Ochota)|| || 제5구역 ||모코투프(Mokotów)|| || 제6구역 ||프라가(Praga)|| || 제7구역 ||바르샤바 자치구역(Warsaw County)|| || 제8구역 ||오켕치에(Okęcie)|| 기습적으로 독일군을 공격해서 바르샤바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한 것처럼 보였으나, 바르샤바의 독일군 대부분은 전력을 보존한 채로 방어태세를 갖추는데 성공했고, 무엇보다 무기고 탈취에 거의 실패했기 때문에 봉기군의 무장상태는 극히 열악했다. 충분한 탄약과 무기를 갖춘 봉기군은 20,000-45,000여의 봉기군 중 2,500여 명에 불과했다. 당시 봉기군의 무장 상태를 보면, [[소총]]은 1,000여 정, [[권총]]은 1,750여 정, [[중기관총]]은 7정, [[대전차포]]는 20문에 불과했다. [[기관권총]]은 300여 정이었고, 25,000여 발의 [[수류탄]]을 보유하고 있었다. [[기관단총]]은 60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폴란드군은 브위스카비차(Błyskawica) 기관단총이라는 [[스텐 기관단총]]의 폴란드 자체 카피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중화기는 커녕 소화기와 탄약의 자체 생산능력조차 처음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장은 이후 시민들이 수류탄, 화염병, 각종 총과 [[테크니컬|시보레 밴에 철판을 붙인]] 간이 장갑차량인 장갑차 쿠부시, [[박격포]] 등을 제작한 덕분에 계속 보강되었다. 연합국이 공수한 보급품도 도움이 되었다. 이외에도 폴란드군은 나치 [[친위대]]의 군복 저장고를 점령하여 쓰기도 했다. 그러나 무기고 탈취가 실패함에 따라, 외부의 도움 없이는 오래 지속하기 힘든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외에도 여러 대의 전투차량이 폴란드군에 [[노획]]되어서 전투에 쓰였고 심지어는 [[5호 전차 판터]] 2량까지 노획하였다. 한편 봉기군이 노획한 2대의 판터는 각각 푸델(Pudel. 혹은 마그다(Magda)), 펠렉(Felek)이라는 이름이 붙여 봉기군의 몇없는 기갑세력으로 쓰였지만, 이후 펠렉은 배터리 고장을 일으켜 폐기되고 남은 탄약을 푸델에게로 옮겼으며 푸델은 [[4호 전차]] H형, [[헤처]] 등과 교전하는 등 몇 번의 전투를 겪고 반궤도 장갑차 1대를 격파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으나 8월 11일 전투 중 큰 손상을 입고 폐기되었다.[* 푸델은 [[월드 오브 탱크]]에 첫 번째로 구현된 폴란드 전차다.] 기록에 따르면 [[6호 전차 티거]] 1량을 노획했지만 노획한 당일에 손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https://blog.naver.com/rudah2066/220657105642|그 밖에도 봉기군은 다수의 독일군 기갑장비를 노획하여 사용하였다.]] [[https://blog.naver.com/419yes/221215633744|기타 차량들의 목록]]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K-soldiers_Parasol_Regiment_Warsaw_Uprising_1944.jpg|width=100%]] || || 친위대 군복을 착용한 파라솔(Parasol) 대대원의 모습. 어깨에 폴란드 국기를 동여맸다. || 반대로 독일군은 본토에서 재편성한 쌩쌩한 부대들이 반격에 나섰고, 소련의 포위를 탈출한 중앙집단군이 바르샤바 근교에서 다시 재정비에 들어갔다. 또한 소련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교량은 철저하게 파괴되거나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14일 비스와 강을 가로지르는 4개의 대교가 모두 파괴되었다. 그리고 친위대 제국지도자인 [[하인리히 힘러]]가 봉기 진압군의 총사령관으로 나섰고, 실제 지휘는 빨치산 진압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SS[[대장(계급)|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조상이 포메른에 정착한 폴란드계 지주귀족이었다. 원래 성은 폰 첼레프스키로 1930년대에 폰 뎀 바흐로 공식 개성하였다. 그러니까 '''봉기군과 진압군 지휘관이 모두 같은 민족이었다'''는 아이러니가 된 것.] [[장군]]이 맡았다. 게다가 폴란드 국내군이 애당초 봉기를 일으켜 폴란드를 장악할 능력 자체가 부족했다. 당시 폴란드 국내군은 무기가 부족했던 탓에 독일군이 보유하고 있던 각종 군사적 요충지에 별로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연합군의 요청에 마지못해 출격한 소련군이 투하한 공중 보급품 중 30%만이 봉기군 점령지로 투하되었으며 나머지는 독일군의 손에 들어갔다. 더군다나 소련군은 [[낙하산]]도 없이 보급품들을 투하하여 대다수가 파손되었기 때문에 공수된 물자의 대부분이 사실상 사용불능 상태였으며, 그나마 온전한 탄약이나 총기류들도 소련제였기 때문에(...) 독일제 장비를 노획하여 사용하던 봉기군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 사실 스탈린은 정치적 이유뿐만 아니라 군사적 이유로도 협력을 거부했다. 소련의 선봉 부대가 바르샤바 교외 라지민(Radzymin)에서 [[발터 모델]]의 독일군에게 괴멸되어 바르샤바를 지원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도시를 양분하는 비스와 강 동안을 점령하긴 했지만, 정작 바르샤바를 지원하기 위한 행동은 거의 취하지 않았다. 호환가능한 소련제 장비를 보급해줘도 모자랄 판에 소련군은 보급품이 아니라 삐라(!)를 살포하기도 했는데, 소련군이 삐라를 뿌린 대상은 독일군이 아니라 봉기군이었다. 게다가 그 삐라의 내용이란 것도 용기를 복돋아주는 내용이 아니라 '''무모한 모험을 중단하고 항복하라'''고 종용하는 아스트랄한 내용이었다. 문제는 비록 [[카틴 학살]]이 폭로되어 이에 경악한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가 소련과 단교를 하기도 했지만, 폴란드는 엄연히 '''연합국의 일원이었다.''' 즉 같은 연합국을 상대로 저런 짓거리를 자행한 셈이다. 소련도 독일군의 파쇄공격에 당한 후에는 당분간 공세를 펴기에는 여력이 부족했고, 굳이 바르샤바 봉기군을 구하기 위해 무리할 생각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기가 계속되었고,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